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 <고양이를 버리다> 리뷰. 아버지와 고양이를 버리러 갔던 유년의 기억을 따라가며 발견한 역사와 개인의 삶에 대한 깊은 성찰, 그리고 마음에 남은 문장들을 소개합니다.
📋 글의 순서
하루키의 팬으로서, 이 책을 고른 이유
저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을 좋아합니다. 그의 소설 속 상상력 가득한 세계도 사랑하지만, 작가의 취향이나 개인적인 생각들을 솔직하게 엿볼 수 있고, 그의 유머러스한 문장들을 만날 수 있는 에세이들을 특히 좋아합니다. <고양이를 버리다>는 특이한 제목부터 저의 강한 호기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무엇보다 이 책에 마음이 갔던 이유는 따로 있었습니다. 예전에 다른 에세이에서 작가가 아버지와 오랜 시간 연을 끊고 지냈다는 이야기를 어렴풋이 읽었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과연 그들의 관계는 어땠을까, 작가는 아버지에 대해 어떤 마음을 품고 있었을까 늘 궁금했습니다. 이 책이 돌아가신 아버지와의 관계를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실마리가 되어줄 거라는 기대감에 첫 장을 넘기게 되었습니다.
서지 정보
- 제목: 고양이를 버리다(원제: 猫を棄てる 父親について語るとき)
- 저자: 무라카미 하루키
- 그림: 가오 옌
- 옮긴이: 김난주
- 출판사: 문학동네
- 출간일: 2021년 04월 28일
- 페이지: 112쪽
아버지와 함께 고양이를 버리던 날
무라카미 하루키의 아버지, 무라카미 지아키 씨에 대한 이 짧은 에세이는 어느 여름날의 기억에서 시작됩니다. 어린 하루키는 아버지와 함께 자전거를 타고 암고양이 한 마리를 해변에 버리러 갑니다.
그저 유년 시절의 사소한 에피소드처럼 보였던 이 사건은, 버리고 온 고양이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집에 먼저 돌아와 있는 기묘한 경험으로 이어지며 하루키의 뇌리에 깊이 각인됩니다.
이 책은 단순히 아버지와의 추억을 나열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하루키는 고양이를 버리러 갔던 기억을 실마리 삼아 아버지의 삶을 조심스럽게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는 아버지가 징집되어 참혹한 전쟁을 겪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아버지는 생전에 그 경험에 대해 거의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아버지가 평생 불단 앞에서 하루도 빠짐없이 기도를 올렸다는 사실을 통해, 아버지가 짊어져야 했던 역사의 무게를 짐작할 뿐입니다.
작가는 아버지의 개인적인 역사가 결국 우리가 사는 세계를 구성하는 거대한 이야기의 일부임을 이야기합니다. 아버지의 삶, 그리고 자신과 아버지의 관계를 통해 역사를 대하는 태도와 그 의미를 담담하게 풀어냅니다.
이 책에서 하루키가 궁극적으로 말하고 싶었던 것은 어쩌면 아주 당연한 사실, 바로 자신은 '한 평범한 인간의, 한 평범한 아들'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마음에 새겨진 문장들
책을 읽는 내내 여러 문장이 마음을 붙잡았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 특유의 담담하면서도 깊은 울림을 주는 문장들은 개인의 삶과 역사의 관계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많든 적든 잊을 수 없는, 그리고 그 실태를 말로는 타인에게 잘 전달할 수 없는 무거운 체험이 있고, 그걸 충분히 얘기하지 못한 채 살다가 죽어가는 것이리라.
➡️ 여기서 말하는 무거운 체험이란 아버지의 전쟁에서 겪은 일들을 이야기하는 것이겠지요. 그리고 그것에 대해 어느 누구에게도 충분히 이야기하지 못한 채 돌아가셨다는 것, 우리 누구나 그런 이야기를 가슴에 품고 살다가 죽는다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그 내용이 아무리 불쾌하고 외면하고 싶은 것이라 해도, 사람은 그것을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역사의 의미가 어디에 있겠는가?
➡️ 불쾌하고 외면하고 싶은 것이라해도 그것을 우리는 인식하고 받아들여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개인의 삶에서도 인류의 역사에 있어서도, 그것이 아무리 잘못됐고, 불쾌한 사실이라해도 말입니다.
우리는 결국, 어짜다 우연으로 생겨난 하나의 사실을 유일무이한 사실로 간주하며 살아있을 뿐이 아닐까.
➡️ 우리는 모두 우연히 생겨난 존재이지만, 유일무이한 존재라는 사실로 자신을 받아들이며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는 광활한 대지를 향해 내리는 방대한 빗방울의, 이름없는 한 방울에 지나지 않는다. 고유하기는 하지만, 교환 가능한 한 방울이다. 그러나 그 한 방울의 빗물에는 한 방울의 빗물 나름의 생각이 있다. 빗물 한 방울의 역사가 있고 그걸 계승해간다는 한방울로서의 책무가 있다. 우리는 그걸 잊어서는 안되리라. 가령, 그 한 방울이 더딘가에 흔적도 없이 빨려 들어가, 개체로서의 윤곽을 잃고 집합적인 무언가로 환치되어 사라져간다 해도. 아니 오히려 이렇게 말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집합적인 무언가로 환치되어가기 때문에 더욱이.
➡️ 우리는 광활한 세계 속의 아주 미미한 존재이지만, 그렇더라도 우리의 존재를 계승해 나갈 의무가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고 작가는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집단적인 사회 속에 교체되거나 대체되더라도 스스로는 자신의 생각과 나다움을 잃으면 안된다는 말처럼 들립니다.
역사라는 건 그런것이다. 무수한 가설 중에서 생겨난 단 하나의 냉엄한 현실
➡️ 아버지의 삶과 작가의 존재 자체가 바로 단 하나의 '냉험한 현실'과도 같습니다. 아버지가 전쟁에서 살아남지 못했다면, 다른 사람과 결혼했더라면 등의 수많은 '가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아버지는 살아남아 어머니와 결혼했고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아들이 태어났으니까요. 우리들의 삶 하나하나가 바로 그런 무수한 가설을 뚫고 나타난 유일한 역사라는 깊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빗방울 하나에 담긴 역사와 삶의 의미(감상평)
아버지에 대한 개인적인 이야기에서 시작해 인류의 역사와 개개인의 존재 의미까지 확장해나가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필력에 다시 한번 감탄하게 됩니다.
우리는 광활한 대지에 내리는 수많은 빗방울 중 이름 없는 하나에 불과할지 모릅니다. 고유하지만, 언제든 다른 것으로 대체될 수 있는 존재. 하지만 그 평범한 빗방울 하나하나에도 고유한 역사가 있고, 그것을 계승해야 할 책무가 있다는 문장은 깊은 울림을 줍니다.
결국 우리는 거대한 역사 속 아주 미미한 존재이지만, 동시에 그 역사를 다음 세대로 이어가야 할 의무를 지닌 존재들입니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아버지의 삶을 되짚어보고, 그로부터 이어진 자신의 역사를 글로 써 내려간 이유도 바로 이 '계승의 의무'를 다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이 책을 읽으며 자연스럽게 김영하 작가의 에세이 <단 한 번의 삶>이 떠올랐습니다. 두 책 모두 부모님과의 추억을 이야기하지만, 삶을 바라보는 관점에서 미묘한 차이를 보입니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무수한 가설 중 생겨난 단 하나의 냉엄한 현실'인 우리의 삶 속에서 역사의 의미와 계승을 이야기했다면, 김영하 작가는 단 한 번뿐인 인생을 후회 없이 살아내는 '인생 사용법'에 초점을 맞춥니다.
결국 두 작가의 이야기는 하나의 결론으로 모입니다. 우리는 우연히 주어진 이 삶을 잘 살아내야 하며, 우리가 지나온 역사를 잊지 않고 다음 세대로 잘 이어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어깨 너머로 역사의 무게를 배운 아들, 무라카미 하루키의 이야기는 그래서 더욱 특별하게 다가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을 좋아하시는 분들이라면 작가와 아버지의 관계에 대해, 삶의 의미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이 책을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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