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에드워드 호퍼>를 보고 화가에게 매료되어 읽게 된 책 <호퍼 A-Z> 리뷰. 호퍼의 작품 세계와 인간적인 면모, 그리고 그의 그림이 우리에게 남기는 여운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글의 순서
- 영화에서 시작된 호퍼를 향한 여정
- 에드워드 호퍼, 도시의 고독을 그린 화가
- <호퍼 A-Z>, 그림 너머의 인간을 만나다
- 빛과 침묵, 호퍼 작품의 매력 속으로
- 관객의 몫으로 남겨진 이야기
- 리뷰를 마치며: 새로운 버킷리스트가 생기다
영화에서 시작된 호퍼를 향한 여정
하나의 다큐멘터리 영화가 때로는 한 예술가의 세계로 우리를 안내하는 문이 되기도 합니다. 다큐멘터리 영화 <에드워드 호퍼>가 바로 그런 문이었습니다. 영화를 통해 스쳐 지나갔던 그의 작품들이 단순한 그림이 아닌, 한 인간의 깊은 내면과 시대의 공기가 담긴 살아있는 풍경으로 다가왔습니다.
영화가 끝나고, 화가 에드워드 호퍼와 인간 에드워드 호퍼에 대해 더 깊이 알고 싶다는 강한 갈증을 느꼈습니다. 그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선택한 책이 바로 얼프 퀴스터의 책 <호퍼 A-Z>입니다.
호퍼 A-Z - 예스24
2023년 4월부터 서울시립미술관에서 호퍼 전시회가 열린다. 한국 최초로 개최되는 호퍼 회고전을 맞아 에드워드 호퍼의 삶과 예술을 담아 써낸 『호퍼 Hopper A-Z』를 박상미가 한국어로 옮겼다. 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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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호퍼, 도시의 고독을 그린 화가
에드워드 호퍼의 대표작, <나이트호크스(Nighthawks)>

책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에드워드 호퍼(Edward Hopper, 1882-1967)에 대해 잠시 짚고 넘어가고 싶습니다. 그는 20세기 미국을 대표하는 사실주의 화가로, 당시 유행하던 추상회화의 흐름을 따르지 않고 자신만의 구상회화 스타일을 고집했습니다. 뉴욕의 일상, 뉴잉글랜드의 풍경 등 그가 평생에 걸쳐 마주한 공간들을 화폭에 담았죠.
그의 그림이 특별한 이유는 단순히 보이는 것을 그린 것을 넘어,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개인의 내면, 특히 익명성과 고립감을 절제된 방식으로 표현했기 때문입니다. 고요하지만 어딘가 모르게 긴장감이 흐르는 그의 작품들은 수많은 예술가, 사진작가, 영화감독에게 깊은 영감을 주었습니다.
<호퍼 A-Z>, 그림 너머의 인간을 만나다
<호퍼 A-Z>는 그의 작품을 나열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의 삶과 철학을 엿볼 수 있는 다양한 단서들을 제공합니다. 책을 통해 만난 인간 호퍼는 매우 흥미로운 인물이었습니다.
호퍼의 내면세계를 엿보다
그가 늘 지니고 다녔다는 괴테의 인용문은 그의 예술 철학을 압축적으로 보여줍니다.
"친애하는 친구, 모든 글의 시작과 끝은 무엇인가, 내 주변 세계를 재현한다는 일, 모든 게 남아 있고, 묶이고, 다시 만들어지고, 반죽되고, 독특한 형태와 방식으로 다시 시작되는 내면세계를 통해 말이야. 이 세계는 영원히 비밀로 남을 걸세..."
호퍼는 자신의 내면세계를 통해 세상을 재창조했고, 그 비밀스러운 세계를 섣불리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그는 로버트 프로스트, 폴 베를렌 같은 시인을 존경했으며, 영화와 연극에도 조예가 깊었습니다. 이러한 예술적 취향들은 그의 작품 세계를 더욱 풍성하게 만드는 자양분이 되었을 것입니다.
말로 할 수 없는 것을 그리는 화가
호퍼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말로 할 수 있다면 그림을 그릴 이유가 없을 것이다."
그에게 회화는 언어가 끝나는 지점에서 시작되는 또 다른 언어였습니다. 그는 작품을 통해 무언가를 명확하게 설명하려 하지 않습니다. 대신 잠재의식의 표현을 중요하게 생각하며, 작품의 중요한 부분은 무의식적으로 들어간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그림 앞에서는 관객이 스스로 이야기를 만들고, 보이지 않는 차원을 상상하게 됩니다.
빛과 침묵, 호퍼 작품의 매력 속으로
고요한 햇빛을 담은 작품, <이른 일요일 아침>

<호퍼 A to Z>를 읽으며 그의 작품들을 다시 보니, 이전에는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새로운 매력들이 보였습니다.

역시나 저의 최애 작품은 그의 가장 유명한 그림인 <나이트호크스(Nighthawks)>입니다. 헤밍웨이의 단편 소설 <살인자들>에서 영감을 받았다는 이 작품은 보고 있으면 마치 내가 그림 속 식당 바깥의 어두운 거리에서 그 안을 조용히 들여다보는 듯한 강렬한 몰입감을 선사합니다.

하지만 호퍼의 매력은 이 작품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푸른 밤>, <오전 7시>, <이른 일요일 아침>, <뉴욕 극장> 등 수많은 작품이 저를 사로잡았습니다.
특히 제가 그의 그림을 사랑하는 이유는 특정한 시간대의 햇빛을 포착해 내는 그의 방식 때문입니다. 늦은 오후의 나른한 햇살, 이른 아침의 서늘하고 깨끗한 빛은 평범한 풍경에 독특한 감정과 분위기를 불어넣습니다.
관객의 몫으로 남겨진 이야기
호퍼의 그림에는 숲이 자주 등장합니다. 그가 좋아했던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 <눈 오는 저녁 숲가에 멈춰 서서>를 떠올리면, 그가 그린 숲의 의미는 무엇일까 하는 궁금증이 생깁니다.
책은 명확한 답을 주지는 않습니다. 어쩌면 호퍼 자신도 명확한 답을 정해두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처럼, 그의 삶과 취향에 대해 알고 나니 그림 속 요소 하나하나가 더 중요하게 다가옵니다.
하지만 그 최종적인 해석은 온전히 감상하는 사람, 즉 우리 각자의 몫으로 남습니다. 그것이 호퍼가 진정으로 원했던 소통 방식이었을 거라 짐작해 봅니다.
리뷰를 마치며: 새로운 버킷리스트가 생기다

책을 덮으며 한 가지 아쉬웠던 점은, 호퍼가 파리에서 만났던 여인과 관련된 이야기가 더 자세히 다뤄지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의 삶에 큰 영향을 주었을 그 시기의 경험이 작품에 어떻게 녹아들었는지 더 깊이 알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책 덕분에 저는 에드워드 호퍼라는 세계에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신기하게도 그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복잡했던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는 평온함을 느낍니다.
그래서일까요, 새로운 버킷리스트가 하나 생겼습니다. 언젠가 그의 작품을 두 눈으로 직접 마주하는 것입니다. 한국에서 다시 전시회가 열린다면 망설임 없이 달려갈 것이고, 기회가 된다면 그의 작품이 있는 미국의 미술관에도 꼭 한번 방문해보고 싶습니다.
특히 호퍼의 가장 많은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 휘트니 미술관(Whitney Museum of American Art)이나, <나이트호크스>를 직접 볼 수 있는 시카고 미술관(Art Institute of Chicago)은 꼭 가보고 싶은 곳입니다.
에드워드 호퍼의 작품 세계에 이제 막 입문하셨거나, 그의 그림 너머의 인간적인 모습이 궁금하신 분이라면, <호퍼 A-Z>는 좋은 길잡이가 되어줄 것입니다.
